성주 도씨(星州 都氏)인 도응유(都應兪)와 경유(慶兪) 형제를 배향하고 있는 서원으로 대구광역시 달서구 용산동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도심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현대식 건물과 전통가옥이 잘 어울리게 지어진 곳입니다.
와룡산(臥龍山) 남쪽 대구광역시 달서구 용산동(일명 西村)의 이 원지(院址)에는 일찍이 1625년 인조(仁祖)3년 성주(星州) 도공(都公) 경유(慶兪) 선생께서 낙음정사(洛陰精舍)를 지어 수학(修學) 강도(講道)하였으며 1675년 숙종조(肅宗朝)에 병암서당(屛巖書堂)을 창건하여 후손들의 종회당(宗會堂) 겸 후학양성 및 사림(士林) 유생(儒生)들의 강학(講學) 논경(論經)과 창의회합(倡義會合)이 빈번하였던 곳이며, 1785년 정조(正祖) 10년 향도(鄕道) 사림(士林)의 공의(公議)로 병암서원(屛巖書院)으로 승호(陞號)되어, 취애(翠厓), 낙음(洛陰) 양 선생(兩先生)을 배향(配享)하였다.
이 書院은 1868년 고종(高宗) 황제의 서원 철폐령(撤廢令)으로 훼철(毁撤)되고 사림봉향(士林奉享)이 중지되었다. 1924년 동지(冬至) 종회(宗會)에서 원(院), 사(祠)의 복건(復建)을 의결하고, 을축년(乙丑年)에 강당(講堂) 묘우(廟宇) 등을 완공하였으며, 1982년 일도 사림(一道 士林)의 복원(復院) 결의로 2년 여에 걸쳐 묘우(廟宇) 궁장(宮牆)을 개축 수리하고, 1984년 3월에 시축지의(尸祝之儀)를 다시 봉행(奉行)하게 되었다.
2000년 8월에 대구시의 도시개발 공사에 따른 토지의 수용 및 지형의 변경 등으로 구원(舊院)을 철거하고, 이 유지(遺址)를 중심으로 1200여 평의 부지(敷地)에 사당(祠堂), 강당(講堂), 동?서재(東西齋)등 목조 건물 10여 동과 회관, 지하주차장 등 연건평 560여 평을 새로 건립하고 2003년 5월에 준공하였다.
도응유 [都應兪]
(都應兪 1574~1639)의 자는 해보, 호는 취애로 성균진사이며, 한강 정구선생 및 낙재, 서사원선생 양문에 사사하여 문장과 덕행이 당세에 추중되었으며, 인흥에 동계정사를 짓고 장여헌, 손모당, 이석담 등 제현과 벗이되어 학문을 닦기도 하였다. 이괄의 난에 창의하여 분의도유사로 천거되었고 정묘호란시에는 상장으로 추대되어 장문의 축성선장의 책략을 입안 상주하였으며, 오현종사 논의에서는 회재, 퇴계 두 선정에 대한 저훼를 변파하였고 한강선생에 대한 무고를 변호하였으며 예설을 편집하여 후생을 가르쳤다.
도경유 [都慶兪]
(都慶兪 1596~1637)의 자는 내보, 호는 낙음으로 한강, 낙재 및 모당 손처눌 세 문하에 수업하였고, 갑자년에는 사마시에 급제하였으며, 정묘호란시 동궁의 남원행가를 호위하고 환궁후 의금부도사로 특제되었다. 그 후 임금을 범하려는 두 역적을 토벌하여, 그 공훈으로 영사일등공신에 참록 되었다. 은율현감, 봉산군수 등의 수령으로 선치하였는데, 봉산군민은 만고엄명청덕비라는 거사비를 세워 재임시의 치덕을 칭송하였고, 평양서윤 재임시에는 정묘호란에서 피랍되어 청나라에 억류된 포로환수의 도차사로 임명되어 심양으로 가서 전원 송환의 중임을 완수하였다. 병자호란중에 경상감사 심 연 및 충청병사 이의배 等과 협모하여 남한산성에서 역전하였으나, 1637년 불의의 변고로 사세하였으며, 그 후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로 추증되었다.
시행일 : 2013년 8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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